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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여사 별세.. 별이 져서 별이 되다
 
2019-06-12 오전 9:48:14 낙동뉴스 mail hys11440@naver.com

    ⌜사 설⌟


    ⌜2019. 6. 10. 오후 11:37분 이희호 여사 召天. 향년 97세.⌟
    밤 늦게 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가 이 부고를 속보로 본 사람이나 다음날 아침 일상을 준비 하기 위해 일어나 이 뉴스를 본 사람 모두 망연자실 하여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호곡(號哭)을 한 사람은 없었지만 이 시대를 살아 가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잠시 만이라도 가슴 무겁게 추도와 묵상을 하게 한 부고에 소환된 이름 이희호(李姬鎬).
    공식적 기록이야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이자 여성 운동가 이지만 그 명칭 만으로는 그 거룩한 여정의 언저리에도 닿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는 크나큰 이름. 파란과 격동과 절망과 환희의 한세기를 오롯이 품어 낸 이름. 그래서 그 이름이 곧 역사일 수 밖에 없다는 푯대. 배달의 여인 이희호.

    1922년 일제 강점기 의사였던 아버지 이용기씨와 어머니 이순이씨 사이의 6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난 이 여사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유복한 가정 환경 속에 이화고등 여학교(이화여고 전신)와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를 나와 1950년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한 뒤에는 미국의 램버스대와 스카렛대에서 유학한 그야말로 신 여성이자 인재 였다.

    그런 그가 1958년 귀국하여 대한YMCA 총무를 시작으로 여성 운동에 뛰어 든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잘못된 유교의 폐습을 맹신하던 시기인 데다 전후 복구 라는 절대적 명제를 안고 있던 시기라 이를 빙자한 가부장적 문화가 절대 가치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맞서 남녀 평등 내지는 남녀 차별적 법 조항을 고친다는 것은 여간한 어려움을 감내 하지 않고는 상상도 못할 시기 였다. 그럼에도 이 여사는 이 폐습에 당당히 맞서 인간의 존엄과 여성의 인권을 부르짖은 최초의 선각자 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여성운동에 매진하던 이 여사가 1962년 만40세의 나이로 우리 현대사의 한 복판으로 나오게 된다.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결혼이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1945년 차용애씨와 결혼해 두 아들(홍일, 홍업)을 얻었지만 1959년 차씨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소위 자식이 딸린 홀아비 인데다 정치적으로도 별반 기반이나 이력이 없던 그야말로 정치적 낭인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 여사 가족은 물론 주변의 지인들 모두가 팔을 걷어 부치고 이 결혼을 만류 하였지만 이 여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여사는 훗날 이를 두고 “꿈이 큰 남자의 밑거름이 되자고 결심하고 선택한 결혼”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보다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됐다” 고 회자 하였다.

    그러나, 결혼 열흘만에 닥쳐 온 김 전 대통령의 ⌜반 혁명 혐의⌟ 체포는 두분과 우리 한국사의 민주화를 향한 고난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 이후 김 전 대통령의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 1972년 미국 망명,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1973년부터 6년 동안 군사 독재 세력으로부터 가해진 가택 연금과 투옥, 1980년 내란음모 사건과 수감, 1982년 미국망명과 귀국 후 또다시 5년 여에 걸친 가택 연금 등 그야말로 군사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 하기 위해 두 분이 겪어낸 고초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요 역사 였다.

    이 위대한 역사의 장정에 김 전 대통령의 아내를 넘어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를 때는 동지로, 야당 총재 시절에는 조언자로 곁을 지켜 정치적 “동역자(同役者)”를 이루어 낸 이가 이 여사다.
    김 전 대통령의 회고 대로 당신을 행동하는 양심이 되도록 이끈 스승이자 큰 그늘이 바로 이 여사다.
    특히나 옥중의 김 대통령을 위해 600권이 넘는 책을 보내 공부를 돕는가 하면 그 엄혹한 시절 전두환을 만나 남편의 석방을 당당히 요구한 것은 그가 단순히 정치적 조언자가 아니라 민주 투사였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투쟁이었다.
    그럼에도 혹시나 흔들릴지 모르는 김 전 대통령과 옥중에서 나눈 800여 통의 서신과 가택연금 시절에는 도청을 우려하여 부부가 필담을 나눈 일화 등은 단순한 행위를 넘어 한발짝 한 걸음이 그대로 역사가 되어 한 세기를 꽉 채우고도 남는다.

    그 지나한 여정이 그 시련이 그 신념이 마침내 민주화로 활짝 피어 1997년 김 전 대통령은 네 번째 도전 끝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다. 그러나 이 시대적 사명은 이 여사에게 있어 또 다른 민주주의 시현의 과제로 인식되어 당신이 평생에 걸쳐 매진해 온 남녀 평등과 약자에 대한 배려는 현장 중심의 생생한 조언을 아끼지 않아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여성 가족부”가 신설되는데 이 여사의 노력과 조언이 결정적 이었음은 부인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한반도 평화 통일에 대한 이 여사의 신념은 단순히 개인의 신념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적 과제라는 대 공감을 이끌어 이 여사가 정치가의 내조자가 아니라 당신 자신이 한국사의 거목 이었음을 모두의 가슴속에 각인 시키기에 충분 했다.

    그런 당신이 오늘 이 거룩한 삶을 뒤로 하고 영면 하셨다.
    역사의 큰 별이 지셨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비록 그 별은 소천 하였으나 그 별은 이내 역사의 별로 다시 되살아나 우리 모두의 가슴과 민주주의 정 복판에 영원 불멸로 빛나고 있을 것임을 안다.
    별이 져서 별이 되신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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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권자©낙동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9-06-12 09:48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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